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(문단 편집) ===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보 ===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조선 인물들 중 관군 측에서는 먼저 [[홍계훈]]은 훈련대장으로 승진했고 1895년 [[을미사변]] 때 일본 낭인들과 이에 가담한 조선인들을 저지하다 죽었고[* 이두황을 질책하다가 근처의 일본인이 그를 죽였다.], [[조병갑]]은 1898년 고등재판관으로서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렸으며, [[이규태(의병장)|이규태]][*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소속이었다. 을미의병 시기 의병장이 되었으나, 홍주성이 함락되자 안면도로 도주한다.]는 항일 의병장이 되었으나, [[이두황]][* 을미사변에 가담했고 아관파천 때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, 순종 즉위 후 귀국하여 전북관찰사로서 의병들을 살육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도지사가 되었다.]과 [[이진호(1867)|이진호]][* 이규태, 이두황, 이진호 모두 우금치 전투 때 관군 지휘관으로 있었는데, 특히 이진호는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교도중대를 이끌고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앞섰다.][* 이진호는 이후 춘생문 사건 때 정동파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했으나, 이후 배신하였고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다.], [[김학진(1838)|김학진]]과 [[이용태(1854)|이용태]], [[박제순]]은[* 김학진과 이용태는 [[경술국치]] 이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, 박제순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경술국치 이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.] 반민족적 친일파 인사로 전락한다. 그리고 동학 측 인물들 중 최시형은 1898년 송경희의 밀고로 인해 한성부로 압송되어 처형당했고, [[손병희]]는 일본으로 망명한 뒤 동학을 [[천도교]]로 개칭한 이후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, 그의 제자 [[이용구]]는 반민족적 친일파 인사로 전락하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